올 추석에 한 졸업생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추석 인사를 하면서, 자신은 중국 남방의 한 대학 한국어과에 교수로 근무하고 있고, 부인도 자기보다 1년 먼저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중국에 들어와 역시 같은 성에 있는 다른 대학 한국어과에서 교수로 있으며, 얼마 전에 딸을 낳아 아빠 된 즐거움을 맛보고 있다고 안부를 전해주었다. 한동안 소식이 끊겨 궁금하던 차였었는데 이메일을 받아보고 참 반가웠다. 그래서 즉시 적혀진 전화번호로 연락해서 한참동안 그 졸업생과 통화하면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 보고 추석을 잘 보내라고 말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 졸업생으로부터 온 이메일을 보고 통화를 하면서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동안 많은 학생들이 거쳐갔지만 그 졸업생은 특이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다. 그는 연변과기대 초창기에 화학공학과(현 생물화공학부 전신)에 입학한 학생이었는데 나의 지도학생으로 배정되었다. 얼굴은 까무잡잡하고 키가 작고 마른 체구였는데 목소리가 좀 허스키하면서 웃는 모습이 천진스러운 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전공보다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인 문학, 철학, 정치 방면에 관심이 많았다. 가끔씩 대화하다가 그 학생이 “사유(思惟)한다”는 말을 많이 써서, 나는 속으로 “그냥 ‘생각한다’고 말하지, 교수 앞에서 문자 쓰네.”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3학년 때는 갑자기 총학생회장에 출마하겠다고 해서 나가보라고 했더니 정말 우여곡절 끝에 당선되었다. 지금까지 연변과기대 학생회장 선거 중에서 그 때 선거만큼 교직원과 학생들이 관심을 많이 가졌고 과열 양상까지 보인 선거는 없었던 것 같다. 중국대학은 일반적으로 총학생회장을 대학 공청당(공산청년당)에서 지명하지만 우리 대학은 초창기부터 학생들의 직접선거로 선출하고 있다.

전공보다는 학생 활동과 문학, 정치 등의 방면에 관심이 많다보니 자연히 학교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학과 교수들 사이에 ‘실속이 없이 말만 잘하는 학생’이라고 평이 나 있었다. 한 번은 사적인 교수 모임에서 그 학생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내가 “그 학생은 학생 나름대로 인생을 고민하면서 성실히 살아가고 있다”고 변호하였다. 그때 다른 교수로부터 “지도교수라고 그 학생을 너무 감싸지 말라”는 말을 듣고 황당해 한 적이 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기 사람이라고 원칙 없이 두둔하고 합리화시키는 것인데, 내가 어떻게 지도학생이라고 편견을 가지고 감쌌겠는가. 지도교수이기 때문에 그 학생과 많은 대화를 나누다보니 다른 교수들보다 좀 더 알고 있어서 오해나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지켜보다는 의도로 한 말인데 그런 반응이 돌아와 참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4학년 때 그는 내가 담당한 전공필수 과목을 F를 받아 그 과목 때문에 1년 늦게 졸업했다. 내가 연변과기대에서 처음으로 F를 주게 된 학생이 바로 지도학생이었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였다. 내가 학생들에게 F를 주러 연변에 왔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요즘에는 “한 번 버린 몸” 하면서 성적이 나쁜 학생에게는 가차 없이 F를 주고 있지만 말이다. 다행히 그 학생은 지도교수가 F를 준 것을 이해하고 별로 원망하지 않았다.

졸업 때가 되어 나를 찾아오더니 연변방송국 기자로 취직할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더니 며칠 후에 다시 와서 개인 비전문제로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하였다. 면접에서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 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밝힌 것이 참 대견스러웠다. 한동안 풀이 죽어 지내더니, 한국에 있는 대학교 신문방송학과로 유학가고 싶다고 하였다. 유학 갈 수 있는 성적이 되지 않고, 더우기 전공 분야가 다른데 어떻게 갈 수 있겠냐고 물었다. 같은 전공으로 대학원에 간다면 성적이 좀 안 되도 내가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전공 분야는 아는 교수가 없어서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졸업하고 나서 몇 달 후에 오더니 북경의 아는 교수 도움으로 한국에 유학가게 되었다고 하였다. 참 재주가 좋구나 하면서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내가 방학 때 한국에 나갔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그 제자가 갓 결혼한 아내와 집에 놀러왔다. 지난 이야기를 하다가 그 제자가 꼬집는 한 마디를 했다. “교수님 때문에 내가 졸업을 늦게 했습니다.” 내가 응수하기도 전에 그의 아내가 내 편이 되어주었다. “교수님, 잘 하셨습니다. 그래야 정신차리지.”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그 제자는 한국에서 대학원 공부하는 것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국의 한 대학교에서 과학기술정책 분야의 석사학위를 받고 중국에 들어가 한국 기업에서 몇 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문학을 하기위하여 다시 한국에 나와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최근에 중국에 들어와 대학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제자의 인생 경로를 지켜보면서, 학과 지도교수로서 이 학생을 ‘성적이 좋지 않은 괴짜 학생’ 정도로 치부해 버렸다면 어찌되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믿음과 신뢰의 비밀을 새삼 깨닫는다. 지도교수로서 그 학생에게 중요한 순간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고집스럽게 “나는 너를 믿는다”는 신뢰와 믿음의 메시지를 계속 보내준 것 밖에는 없다. 그것이 끈이 되어 지금까지도 연락하는 사제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고 자신의 길을 잘 찾아 가고 있다고 본다. 그 제자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자기 학생들에게도 튜터나 멘토로서 신뢰와 믿음의 가르침을 베풀어주길 기대한다.